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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전문 채널 - 테슬라와 에디슨 전류 전쟁#2

교류의 아버지 테슬라와 발명왕 에디슨

전류 전쟁 : 테슬라와 에디슨 교류의 아버지 테슬라의 기구한 운명

 에디슨은 세르비아 태생의 이 정체의 모를 과학자 테슬라에게 그 이야기는 농담이다 로 5만 달러의 지불을 거절했다. 테슬라는 화가 나 격렬한 말다툼 끝에 그는 회사를 잘리게 되었다. 교류 전원이 세상에 나오면 직류 전원의 사명은 끝나 특허 사용료가 들어오지 않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에디슨은 모든 루트를 사용해 테슬라의 말살을 시도했다. 그것은 테슬라가 일할 곳을 없애는 것으로 미국 사교계로부터도 내쫓는 것을 의미했다. 억만장자 에디슨에 있어서 그 지명도를 풀 활용 하면 테슬라를 매장하는 것은 이렇다 할 어려움은 없었다. 가난의 수렁에 빠져있던 테슬라를 구한 것은 억만장자 죠지 웨스팅하우스였다. 그는 테슬라의 재능을 알아보고 곧 바로 100만 달러의 연구비와 특허의 사용료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직류 발전인가 교류 발전인가의 자웅을 결정하는 전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에디슨이 일으킨 GE와 웨스팅하우스사와의 10년에 달하는 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발명가이며 실업가인 에디슨은 치고 나와 교류가 얼마나 인체에 있어서 위험한가의 네거티브 캠페인을 시작했던 것이다. 실험가이기도 한 에디슨은 들개나 도둑고양이를 모아 교류식 발전기에서의 감전사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다. 이 실험은 1903년에 조련사 3명을 살해한 코끼리의 톱시의 처형으로 전성을 다했다. 에디슨은 동시 병행으로 활로 루도 P 브라운을 지원했다. 이 당시 미국에서는 교수형을 대신할 안락사 방법이 모색되고 있었던 시기로 전기의자의 처형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GE도 웨스팅 하우스사도 이 전기의자에 자사의 전원이 사용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었다. 사형에 사용된 전원이 자신의 가정까지 들어와 있는 것을 여론이 기분 좋게 생각할 리는 없고 네거티브 캠페인에는 안성맞춤인 Theme였다. 1890년 전기의자에 의한 첫 사형 집행을 했다. 전원은 교류 전원이 사용되었다. 이 사형 집행은 매우 잔인했다. 어느 정도의 전압으로 죽음에 이를지의 데이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1회째는 17초간 교류 전류를 흘렸지만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다. 2번째 감전을 위해 발전기를 충전할 필요가 있다. 그사이 사형수로부터 신음 소리가 계속 들렸다고 한다. 2번째의 감전은 전압이 2천 볼트에 가압되어 1분 이상 행해졌다. 살이 구워져 머리 부분으로부터 연기가 올라오는 끔찍한 상황으로 보도되었다. 사형 집행 후에는 죄수의 사체로부터 불길이 올랐다고도 말한다. 테슬라 진영도 입 다물고 있지는 않았다. 얼마나 교류가 안전한가 테슬라 코엘에 의한 방전 실험에서 책을 읽어가며 테슬라는 자신이 인체실험을 하여 안심감을 심어 주었다. 그 후 1896년 나이아가라의 폭포의 수력 발전에서 교류 방식이 채용됨에 따라 교류 방식이 승리, 전류 전쟁은 종결되었다. 에디슨의 패배였다. 테슬라는 수많은 성과를 남기는 한편 국방에 관한 기밀푸므이 개발에도 관계되어 있었다. 그러한 계획은 힘의 무선 송수신, 공진 장치의 개발, 시간의 제어 등이었다고 하지만 이것들의 많은 부분은 수수께끼에 쌓여 있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른다. 1943년 테슬라는 연구실 안에서 빈곤과 실의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 테슬라는 방대한 일기와 논고는 테슬라 스스로의 손으로 불태워져 영원히 매장되었다. 이 논고들은 인류에게 있어서 너무 위험하다고 하는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였다. 광기의 천재 과학자가 꿈꾼 장치란 대체  무엇이 있는지 지금의 우리는 알 수 없다.